[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없군'과 스탕달 증후군

입력 2024-01-24 17:58   수정 2024-01-25 00:09

캄보디아에서 만난 이호범 님과는 어느새 SNS 친구가 되었다. 그는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문학기행을 이끄는 가이드였고 버스 안에서만큼은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불문학을 전공하고 스탕달에 대한 논문을 썼다는 이호범 님이 불어가 적힌 안내문을 읽자, 버스 안의 작가들은 환호했다. 문학을 경유했다는 공통 감각 때문에 그를 더욱 친근하게 느끼는 듯했다.

서울로 돌아와 캄보디아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자, 그가 ‘좋아요’를 눌렀다. 함께 보낸 시간을 상기하면 ‘좋아요’뿐이겠는가. 이번 여행은 감사와 감탄과 놀라움이 가득했다. 버스 안에서 간단한 캄보디아 말도 몇 가지 배울 수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감사합니다’란 뜻을 가진 말이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가진 게 없어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에요. 자 따라 해보세요. 없군.”

‘어꾼’이라는 발음과 비슷한 한국말을 찾아 기억하기 쉽도록 지어낸 이야기에도 가슴이 뜨끔했다. 가진 게 없는데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라니, 내가 가져 본 적 없는 마음이었다. 없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가지려고 애쓰지 않을 텐데…. 가진 것에 감사하느라 없는 것에 대해선 감사할 일이 별로 없었다. 의도치 않은 심연 속으로 나를 던져 놓고 그가 하던 말을 이었다. 캄보디아가 주는 최고의 선물은 캄보디아 사람들의 환한 미소라며, 그 미소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두 명씩 짝지어 뚝뚝이를 타고 이동할 거예요. 뚝뚝이에서 내리면서 ‘생큐’ 대신 ‘없군’이라고 말해보세요.”

그가 말해준 것처럼 감사 인사를 했을 때, 정말 뚝뚝이 기사님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저 웃음 앞에선 전쟁이 훑고 지나간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되더라도 함부로 절망할 수 없을 것 같다. 절망 속에서도 저 웃음처럼 존재하는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 속에서 바욘 사원 앞에 다다랐기 때문일까? 사면 탑에 새겨진 얼굴을 보는데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천년의 미소’라고 불리는 ‘앙코르의 미소’ 앞에서 잠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위대한 걸작과 대면하는 순간 흥분 상태에 빠지는 증상을 일컬어 ‘스탕달 증후군’이라고 한다는데, 정신을 차리는 와중에 스탕달 논문을 썼다는 가이드의 말이 생각나 웃음이 터졌다.

타 프롬 사원에서는 머리가 없는 불상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머리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힌두교가 집권하면 불상의 머리부터 잘랐다고 한다. 영혼을 믿으면서 동시에 영혼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인간의 마음이구나 싶어 난데없이 슬픔이 차올랐다. 사원을 움켜쥔 스펑나무 뿌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스펑나무가 사원을 붕괴하는 동시에 지탱하고 있다고 한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라던 붓다의 가르침을 형상화한 듯했다.

사원을 에워싼 매미 울음소리 한가운데서 나는 또 가슴이 벅차올랐다. 걸핏하면 황홀경인데 앙코르와트에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나 있을까 싶었다. 걱정하면 걱정하는 일이 꼭 일어난다. 앙코르와트 사원의 3층 계단을 내려오다가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이 까져 피가 났는데 사람들이 어쩌다 그랬냐고 물으면 계단이 가파르고 어쩌고 하는 구차한 말을 다 넣어두고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스탕달 증후군” 때문이라고.

캄보디아 식당에서는 자주 전기가 나갔다. 불이 꺼지면 휴대폰 조명을 켜고 앞 사람과 눈을 맞추고는 이상하고 아름답게 늘어진 그림자 속에서 밥을 먹었다. 끓는 냄비 속에서 버섯을 건져 먹으며 어둠이 이렇게 정다운 거라면 전기가 없어도 감사하지 않겠는가. 캄보디아식으로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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